가끔 인터넷을 둘러보면 익숙한 일본 군인의 얼굴이 보인다
일본인들은 이 사람을 ' 3대 오물 ' 중 하나
한국인들은 그의 행보 때문에 ' 임정(임시정부)의 스파이 ' 를 추측한다
일제를 패망하는데 공을 세운 인물
' 무다구치 렌야 ' 에 대해 설명하겠다
때는 1888년 10월 7일, 일본 사가현에서 태어난 그는
1910년 22살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사적 재능이 있었는지 1917년 고급 참모과정으로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군인적인 행보의 처음은 일본의 시베리아 침공이었다
러시아의 당시 볼세비키 혁명으로 공산당이 집권하였고
일본은 이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출병하였으나 아무런 성과도 없이 철수하였다
이후 그는 프랑스 주재무관으로 파견을 가고
나중에는 소좌로 진급하여 캄차카반도에 홀로 정탐활동을 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그리고 일본으로 돌아와 참모본부에서 근무하는 등 커다란 성과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그가 처음 활약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무다구치 렌야는 1936년 베이징 근처 일본군 제1연대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일본은 노구교(루거우차오)에서 중국 국민당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1937년 7월 총소리가 들리고 일본군 병사 1명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일본군은 국민당군에게 협조를 요청하며 사라진 병사를 수색하였고
병사는 알고보니 20분 뒤에 스스로 부대에 복귀하였다
일본군 장교 : 야 어디갔다 왔냐 ?
일본군 병사 : ㅎㅎㅈㅅ 화장실 좀
병사 실종 문제는 별거 아니였고 총소리 문제는 일본과 국민당이 회담을 열고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우리 렌야 대령은 대한의 독립을 위해
이 좋은 명분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무다구치 렌야(1연대장) : 야 공격해라
이치키 기요나오(3대대장) : 진심이세요 ?
무다구치 렌야 : 정말 해버려도 좋단 말이야 !!!!
렌야의 호랑이 같은 포효에 부하들은 결국 협상중인 국민당군을 공격하였고
렌야는 여기서 언론플레이를 하였다
무다구치 렌야 : 황군의 사무라이 정신을 보여주자 !!
병사들에게 용감히 돌격하라는 렌야는
기자들 앞에 서서 팔에 피묻은 붕대를 감고
무다구치 렌야 : 국민혁명군의 도발을 내가 직접 격퇴하고 있다
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본인은 전선에서 싸우지 않았다
당시 일본 총리 코노에 후미마로는 전쟁이 확전나는걸 바라지 않았지만
입장을 바꿔 오히려 군을 증강시켰고 렌야의 활약 덕에 ' 중일전쟁 ' 이 발발하였다
일개 연대장이 상급자에게 보고도 없이 전투 명령을 하였으나
렌야는 아무런 징계도 없이 소장으로 승진하여 4군 참모장에 임명되고
이후 일본 유년학교(사관학교)의 교장에 임명된다
장군이 된 렌야는 1940년 중장으로 승진하고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공습하여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남부전선의 일본군은 영국이 가지고 있는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를 점령하여 영국의 해군기지와
군사시설을 장악하려고 했다
렌야는 이때 왼쪽 어깨에 수류탄 파편을 맞았는데
술잔치를 벌이다가 날아오는 폭격을 피해 하수구에 숨는 도중에 다쳤다
상급자인 사령관 야마가타는 열심히 싸운(?) 렌야에게 포도주와 문안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렌야는 싱가포르 공격 중 지트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영국군은 55일만에 무너졌다
이때 영국이 가진 보급품을 먹으며 진격했다고 한다
렌야는 여기서 병법의 한 부분을 깨닫게 되었고 나중에 훗날 써먹게 된다
그리고 대본영은 말레이시아를 넘어 버마(지금의 미얀마)까지 공격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때 영국군은 패전을 거듭하여 정비가 덜 된 상황이라 승산이 있었지만
독립운동가 렌야 장군은 철천지 왜놈들이 승전하는 꼴을 보기 싫었기 때문에
이 작전을 당시 일본의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에게 반대하는 주장을 했다
당시 전선의 상황을 모르고 있던 도조 히데키는 렌야 장군의 의견에
냉철한 판단을 내렸다고 극찬을 하였다
?????
그리고 마침내 영국군이 정비를 마치고 일본이 점령한 버마를 진격하려고 하였다
버마를 지키는 15군 사령관에 임명된 렌야는 지금이야말로 버마를 공격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버마에서 아라칸 산맥을 넘어 인도 북부 아삼지방을 공격해 영국을 기습하자는
' 임팔 작전 ' 을 도조 히데키에게 결재를 올린다
일단 영국군이 인도제국군과 합세하여 재정비를 한 상태이며
임팔 작전 수행지역이 밀림지대라 제일 중요한 보급이 어려웠다
일단 병사 개개인이 소지할 수 있는 보급품은 15일치, 작전 수행기간은 3달이 넘었다
하지만 도조 히데키는 일본군의 계속 되는 패전 소식에 한번 믿어보았다
그것도 목욕탕에서 결재를 하였다
일단 당시 일본은 총리부터 문제가 있는 놈이었다
대망의 임팔 작전이 개시되고
당연히 보급품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뱀이나 곤충 등을 잡아먹었고
영국과의 전투보다 굶어 죽는 병사들이 더 많아졌다
15군 31사단 사토 중장은 독단적으로 퇴각하겠다고 갈갈이 날 뛰자
렌야 장군은 사토가 정신병이 있다고 주장하고 그는 본국으로 소환당했다
그의 공은. . 아니 실책은 9만2천의 대군이 투입된 임팔 작전은 당연히 대실패였다
전사자도 있지만 그 중 아사자가 대부분을 차지했고 그 수는 5만 2천명,
부상자는 2만 3천명이었다
당연히 이 실패는 처형감이었지만 렌야는 명줄이 길었는지 예비역으로 편입되고
나중에는 사관학교 교장으로 임명된다
임팔작전에 남긴 그의 주옥 같은 명언과 독립의지가 담긴 행보는 너무 많아 추후에 따로 작성하겠다
이후 일본이 패전하고 도쿄에서 연합군은 일본군을 기소하기 위해
극동군사재판을 개정하였다
무다구치 렌야는 15군 사령관이었기 때문에 검사측은 A급 전범에 사형을 기소하였으나
하지만 전쟁 범죄 여부가 보이지 않자 2년 수감 생활 끝에 석방되었고
그는 죽기 직전까지 ' 내 작전의 실패는 부하들 탓이다 ' 라는 유언을 남기고
77세까지 별 문제 없이 살다가 1966년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무덤은 ' 타마레이엔 ' 이라는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는데 여기는 도고 헤이하치로,
야아모토 이소로쿠 등의 유명한 장군들이 묻혀있는 곳이었다
일으키지도 않아야 될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임팔 작전을 통해 전황이 어려운 일본에게 빅엿을 선사한 렌야 장군
정말 임시정부가 파견한 엘리트 스파이가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우스갯소리로 이 분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해야한다는 의견도 있다
다음에는 렌야 의사 아니. . 무다구치 렌야의 어록과 행보를 자세히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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