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Tennessee(Pearl Harbor, 2001)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은 대대적으로 남한을 침공하였다
당시 대한민국은 2/3이상의 장병들이 모내기를 하기 위해 외박 및 휴가를 내려간 상황
북한은 그 타이밍을 노리고 남침을 한 것이다
개전 3일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개전 40일쯤에 낙동강까지
밀려내려가면서 국군은 사력을 다해 낙동강을 방어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낙동강에서만 방어할수 없는법
그때, 미군측에서 방법을 하나 제의했다
작전명 ' 174 '
적의 본진이 있는 영덕군 장사리를 기습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그 작전을 수행하는 대원들은
특전사도, 정규군도 아닌
10대의 어린 학도병 772명이다
북한군을 교란하기 위해 북한군과 최대한 비슷한
남한 출신의 학생들이 작전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만난 태풍으로 LST문산호가 좌초되고
가까스로 영덕군 장사리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학도병들은 해안에 상륙하였지만 그곳에 주둔해 있던 북한군들에게
학도병 60명이 전사하였다
북한군은 영덕군 장사리에 적이 쳐들어온것을 눈치채고
거의 모든 병력들이 장사리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일단 또 대비를해서 처음에는 군산에 상륙하겠다는 소문을 북한에 펴트렸다
그러나 군산과 장사리는 미끼였다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북한군이 장사리에 유인한틈을타 인천을 대대적으로
공격한다
인천상륙작전과 장사상륙작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양동작전이 성공하였다
1/5000이라는 성공 확률이 희박한 인천상륙작전은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월미도를 점령한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으로 대대적으로 상륙을하고
2주만에 서울을 수복하였다
장사리에 있던 살아남은 학도병들은
얼마 남지 않은 식량과 물자로 버티기 시작했다
서울을 탈환한 국군은 장사리에 학도병을 구하러 갔으나 북한군이 학도병들을 습격하는 바람에
구출을 포기하였다
구출선인 조치원호가 나타나자 북한군의 공격 속에 39명의 소대가 남아 저지하였고
가까스로 탈출한 병력은 640명
작전에서 생존한 그 당시 학도병이었던 사람들과
맥아더의 친필서가 아니었다면 세상에 드러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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